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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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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족대표 33인은 1919년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종교계 인사 33인을 지칭한다. 이들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각 종교를 대표하며 독립선언서를 통해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표명했다. 3·1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맞선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었으나, 민족대표가 종교계 인사로 제한되어 사회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일부 민족대표의 친일 행위는 역사적 오점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3·1 운동과 독립선언서는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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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민족대표 33인
태화관
태화관
주요 활동3·1 운동의 주도 및 독립선언서 서명
결성 시기1919년 3월
주요 장소태화관
구성
종교별 구성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서명자 수33인
배경 및 목적
목적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표명
조직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민족적인 통합을 도모
주요 인물
천도교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박준승
최린
이종훈
홍기조
나인협
양한묵
김완규
권병덕
이갑성
임예환
김창준
신홍식
기독교이승훈
박희도
김병조
정춘수
양전백
길선주
유여대
김성수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신석구
박동완
나용환
이명룡
함태영
불교한용운
백용성
역사적 의미
3·1 운동의 촉매민족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전국적인 항일 운동으로 확산
현대사 영향대한민국 건국 이념 형성에 기여
기타
관련 서적신복룡의 《한국사 새로 보기》 199-210쪽 참고

2. 민족대표 33인 명단

다음은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이다.

종교이름사진생몰출신 지역신분형량이후 행적건국훈장 등급서훈 연도
천도교손병희
1861~1922충북 청주천도교 3세 교주징역 3년병보석 출감 후 사망대한민국(1)1962
권동진
1861~1947충북 괴산천도교 도사징역 3년신간회, 광주학생운동 관련 1년 복역대통령(2)
오세창
1864~1953한성서예가, 전각가 및 금석학 역사가로 활동
임예환1865~1949평남 평양징역 2년-
나인협1872~1951평남 성천-
홍기조
1865~1938평남 남포-
박준승
1866~1927전북 임실-
양한묵
1862~1919전남 해남재판 중 사망
권병덕1867~1944충북 청주징역 2년-
김완규1876~1949한성천도교 전제관장-
나용환
1864~1936평남 성천천도교 도사천도교 교역
이종훈[6]1856~1931경기 광주천도교 장로천도교 교역
홍병기1869~1949경기 여주고려혁명당 관련 징역 2년형
이종일1858~1925충남 태안천도교 월보과장 (보성사 사장)징역 3년제2의 독립선언문 작성
최린--1878~1958함남 함흥보성고보 교장징역 3년변절--
불교한용운1879~1944충남 홍성승려징역 3년신간회, 사회계몽대한민국(1)1962
백용성1864~1940전북 장수승려징역 1년 6월임정 지원대통령(2)
개신교이승훈
1864~1930평북 정주장로교 장로징역 3년오산학교 운영대한민국(1)1962
박희도[7]1889~1952황해 해주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북감리교)징역 2년변절--
이갑성[7]1889~1981경북 대구세브란스의전부설병원 사무원 (장로교)징역 2년 6월임정, 흥업구락부 사건 연루 7개월 복역대통령(2)1962
오화영1880~1960황해 평산남감리교 목사징역 2년 6월광주학생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연루 옥고, 해방 후 재북대통령(2)1989
최성모1874~1937황해 해주북감리교 목사징역 2년목회활동대통령(2)1962
이필주1869~1942한성정동교회 목사 (북감리교)목회활동
김창준[7]1889~1959평남 강서북감리교 전도사징역 2년 6월목회, 신학 공부, 한국전쟁 중 월북--
신석구1875~1950충북 청주남감리교 목사징역 2년목회활동대통령(2)1963
박동완1885~1941경기 포천기독교신보사 서기 (북감리교)신간회, 목회활동대통령(2)1962
신홍식1872~1939충북 청주북감리교 목사목회활동
양전백1869~1933평북 선천장로교 목사-
이명룡1872~1956평북 철산장로교 장로-
길선주[8]
1869~1935평남 안주장로교 목사무죄 (구금 1년7월)목회활동독립(3)2009
유여대[8]1878~1937평북 의주징역 2년목회활동대통령(2)1962
김병조[8]1877~1948평북 정주-상해로 망명, 임정 활동대통령(2)1990
정춘수[8]1873~1953충북 청주남감리교 목사징역 1년 6월변절--



민족문제연구소최린, 박희도, 정춘수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2. 1. 천도교

1919년 당시 천도교는 국내 최대 종교 중 하나였으며, 3.1 운동을 주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천도교 측 민족대표로는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등 15인이 참여하였다.

이들 중 손병희, 이종일, 최린은 징역 3년형을,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권병덕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양한묵은 재판 중 사망하였다. 최린은 3.1 운동 이후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다.

성명사진출신 지역신분재판 결과건국훈장 등급서훈 연도
손병희충청북도 청주천도교 3세 교주징역 3년대한민국(1)1962
권동진충북 괴산천도교 도사대통령(2)
오세창한성
임예환평남 평양징역 2년
나인협평남 성천
홍기조평남 남포
박준승전북 임실
양한묵전남 해남
권병덕충북 청주징역 2년
김완규한성천도교 전제관장
나용환평남 성천천도교 도사
이종훈[6]경기 광주천도교 장로
홍병기경기 여주
이종일충남 태안천도교 월보과장 (보성사 사장)징역 3년
최린--함남 함흥보성고보 교장--


2. 1. 1. 손병희 (孫秉熙, 1861~1922)



손병희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천도교 3세 교주였다. 1919년 3.1 운동을 총지휘하였으며,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6] 병보석으로 출감 후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2. 권동진 (權東鎭, 1861~1947)



권동진(權東鎭, 1861년~1947년)은 충북 괴산 출생의 천도교 도사이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6] 3·1 운동 이후, 신간회, 광주학생운동 등에 참여하며 민족 운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3. 오세창 (吳世昌, 1864~1953)



서울 출생으로, 천도교 도사였다.[6] 서예가, 전각가, 금석학자 및 역사학자로 활동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4. 임예환 (林禮煥, 1865~1949)

임예환(林禮煥, 1865~1949)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의 천도교 도사였다.[6]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6]

출신 지역신분형량건국훈장 등급서훈 연도
평안남도 평양천도교 도사징역 2년대통령(2)1962


2. 1. 5. 나인협 (羅仁協, 1872~1951)

나인협(羅仁協, 1872년 ~ 1951년)은 평안남도 성천 출생의 천도교 도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6. 홍기조 (洪基兆, 1865~1938)

홍기조(洪基兆, 1865~1938)는 평안남도 남포 출생의 천도교 도사였다.[6]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6]

출신 지역신분형량서훈
평안남도 남포천도교 도사징역 2년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 (1962년)


2. 1. 7. 박준승 (朴準承, 1866~1927)



박준승(朴準承, 1866년~1927년)은 전라북도 임실 출신의 천도교 도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8. 양한묵 (梁漢默, 1862~1919)



1862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출생한 천도교 도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재판 중 사망하였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9. 권병덕 (權秉悳, 1867~1944)

권병덕(權秉悳, 1867년 ~ 1944년)은 충북 청주 출신의 천도교 도사였다.[1]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1]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1]

2. 1. 10. 김완규 (金完圭, 1876~1949)

서울 출생으로, 천도교 전제관장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6]

2. 1. 11. 나용환 (羅龍煥, 1864~1936)



나용환(羅龍煥, 1864년 ~ 1936년)은 평안남도성천 출신의 천도교 도사이다.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천도교 교역자로 활동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6]

2. 1. 12. 이종훈 (李鍾勳, 1856~1931)

이종훈(李鍾勳, 1856년 ~ 1931년)은 경기도 광주 출신의 천도교 장로였다.[6] 천도교 교역자로 활동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13. 홍병기 (洪秉夔, 1869~1949)

홍병기(洪秉夔, 1869~1949)는 여주시 출신 천도교 장로였다.[6] 3.1 운동 이후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14. 이종일 (李鍾一, 1858~1925)

이종일(李鍾一, 1858년 ~ 1925년)은 충청남도 태안 출신으로, 천도교 월보과장이자 보성사 사장이었다. 3.1 운동 당시 제2의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1. 15. 최린 (崔麟, 1878~1958)

함경남도 함흥 출생으로,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지냈다. 3.1 운동 이후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다.[7]

2. 2. 개신교

3·1 운동 당시 개신교는 서구 문물의 유입 통로이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개신교계에서는 이승훈 장로를 비롯한 16명이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개신교 인사
성명출신 지역신분재판 결과건국훈장 등급(서훈 년도)
이승훈평안북도 정주장로교회 장로징역 3년대한민국장(1등급) (1962)
박희도황해도해주중앙YMCA 간사(북부감리교)징역 2년-
이갑성경상북도대구세브란스병원 사무원(장로교)징역 2년 6개월대통령장(2등급) (1962)
오화영황해도평산남부 감리교 목사징역 2년 6개월대통령장(2등급) (1989)
최성모황해도해주북부 감리교 목사징역 2년대통령장(2등급) (1962)
이필주서울특별시(京城府)
김창준평안남도강서북부 감리교 전도사징역 2년 6개월-
신석구충청북도청원남부 감리교 목사징역 2년대통령장(2등급) (1963)
박동완경기도포천기독교 보좌서기(북부 감리교)대통령장(2등급) (1962)
신홍식충청북도청주북부 감리교 목사
양전백평안북도선천장로교 목사-대통령장(2등급) (1962)
이명룡평안북도철산장로교 장로-대통령장(2등급) (1962)
길선주평안남도안주장로교 목사무죄독립장(3등급) (2009)
유여대평안북도의주징역 2년대통령장(2등급) (1962)
김병조평안북도정주-대통령장(2등급) (1990)
정춘수충청북도청원남부 감리교 목사징역 1년 6개월-



이 중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설립해 민족 교육에 힘썼고, 이갑성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오화영은 광주학생운동과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길선주는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1년 7개월간 구금되었다. 김병조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박희도정춘수는 이후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다.

2. 2. 1. 이승훈 (李昇薰, 1864~1930)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장로교회 장로였다. 오산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에 힘썼다. 3·1 운동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7]

2. 2. 2. 박희도 (朴熙道, 1889~1952)

박희도[7]는 1889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북감리교)였으며,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으며,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 2. 3. 이갑성 (李甲成, 1889~1981)

이갑성(李甲成, 1889년 ~ 1981년)은 경상북도대구 출신으로, 세브란스의전 부설병원 사무원이었다. 장로교 신자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했다.[7]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이갑성
출생 지역경상북도 대구
신분세브란스병원 사무원 (장로교)
재판 결과징역 2년 6개월
주요 행적임정 활동, 흥업구락부 사건 연루 7개월 복역
건국훈장 등급대통령장 (2등급)
서훈 년도1962


2. 2. 4. 오화영 (吳華英, 1880~1960)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남감리교 목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7] 광주학생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에는 북한에 남았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2. 5. 최성모 (崔聖模, 1874~1937)

최성모(崔聖模, 1874~1937)는 황해도 해주 출신 북감리교 목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7] 출소 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7]

2. 2. 6. 이필주 (李弼柱, 1869~1942)



이필주(李弼柱, 1869년 ~ 1942년)는 서울 출신으로, 정동교회 목사 (북감리교)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7] 출소 후에는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2. 7. 김창준 (金昌俊, 1890~1959)



김창준(金昌俊, 1890년 ~ 1959년)은 평안남도강서 출신의 북감리교 전도사였다.[7]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7] 출소 후에는 목회 및 신학 공부에 전념하였으며, 한국 전쟁 중 월북하였다.[7]

2. 2. 8. 신석구 (申錫九, 1875~1950)

신석구(申錫九, 1875년 ~ 1950년)는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남감리교 목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7] 출소 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2. 9. 박동완 (朴東完, 1885~1941)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기독교신보사 서기(북감리교)였다.[7] 3·1 운동 이후 신간회에서 활동하고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7]

2. 2. 10. 신홍식 (申洪植, 1872~1939)

신홍식(申洪植, 1872년 ~ 1939년)은 충청북도 청주 출신의 북감리교 목사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7] 출소 후에는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2. 11. 양전백 (梁甸伯, 1869~1933)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장로교 목사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8]

2. 2. 12. 이명룡 (李明龍, 1872~1956)

이명룡(李明龍, 1872년 ~ 1956년)은 평안북도 철산 출신의 장로교 장로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8]

2. 2. 13. 길선주 (吉善宙, 1869~1935)

평안남도 안주 출신의 장로교 목사이다.[8]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1년 7개월간 구금되었다.[8] 이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이 추서되었다.[8]

2. 2. 14. 유여대 (劉如大, 1878~1937)

평안북도 의주 출신이다. 장로교회 목사[8]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8] 출소 후 목회 활동을 이어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8]

2. 2. 15. 김병조 (金秉祚, 1877~1948)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장로교회 목사였다.[8] 3·1 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2. 2. 16. 정춘수 (鄭春洙, 1873~1953)

정춘수(鄭春洙, 1873년 ~ 1953년)는 충북 청주 출신의 남감리교 목사였다.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하여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8] 그러나 3.1 운동 이후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하였으며,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 3. 불교

불교계에서는 한용운백용성이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었다.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 승려로 신흥사에서 수행하였으며, 신간회 활동과 사회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백용성은 전라북도 장수 출신으로 해인사에서 수행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두 사람 모두 3·1 운동에 참여하여, 한용운은 징역 3년, 백용성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6]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인사
이름출생 지역주요 활동형량건국훈장 등급 (서훈 년도)
한용운충청남도 홍성신흥사 수행, 신간회 활동, 사회계몽 운동징역 3년대한민국장(1) (1962)
백용성전라북도 장수해인사 수행,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징역 1년 6개월대통령장(2) (1962)


2. 3. 1. 한용운 (韓龍雲, 1879~1944)

충청남도 홍성 출생으로, 불교 승려였다. 신흥사에서 수행하였다. 신간회 활동 및 사회계몽 운동에 참여했으며, 3.1 운동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6]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되었다.

2. 3. 2. 백용성 (白龍城, 1864~1940)

白龍城|백용성중국어(1864년 ~ 1940년)은 전라북도 장수 출신의 승려이다. 해인사에서 수행하였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되었다.

3. 민족대표 33인의 한계와 의의

대한독립선언서(독립선언문)는 3.1운동 정신의 근간이자 대한민국의 주권을 기록한 주요 문헌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의 근거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1]

일제 침탈로 정치, 사회, 경제 분야가 친일로 변질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족 지도자인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이 전개되었다.[2]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종교계 인사였고, 이들 중 3명은 후에 친일반민족행위로 변절하였다는 한계가 있다.[3][4]

3. 1. 한계

대한독립선언서(독립선언문)는 3.1운동 정신의 근간이자 대한민국의 주권을 기록한 주요 문헌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의 근거가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을 계승하고 있다.[1]

일제 침탈로 정치, 사회, 경제 분야가 친일로 변질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족 지도자인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이 전개되었다.[2] 사회 전반이 친일화된 상황에서 독립선언서 작성 및 배포 등 3.1운동 전반에 종교계가 앞장섰으나, 이는 민족대표 33인이 모두 종교계 인사라는 한계로 이어졌다.[3] 이들 33인 중 3명은 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하였다.[4]

3. 2. 의의

대한독립선언서(독립선언문)는 3.1운동 정신의 근간이 되었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기록한 주요 문헌이 되었다.[1] 3.1 독립선언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의 근거가 되었고, 현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을 잇는 대한민국 정부에 그 정신이 계승된다.[2]

일제의 침탈로 정치, 사회, 경제 분야가 친일로 변질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족 지도자로서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을 전개하였다.[3] 사회 전반이 친일 변질된 상황에서 독립선언서 작성 및 배포 등 3.1운동 전반에 종교계가 앞장섰으나, 민족대표 33인 모두 종교계 인사들이라는 한계가 있다.[4] 이들 33인 중 3명은 후에 친일반민족행위로 변절하였다.[5]

참조

[1] 서적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도서출판 풀빛 2001-12-20
[2] 서적 한국사 새로 보기 도서출판 풀빛 2001-12-20
[3] 본문
[4] 서적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 서문당
[5] 본문
[6] 본문
[7] 본문
[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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